우리의 한림, 우리의 사회복지학부
― 비전과 실천―
명예교수 김현용
40년 전인 1982년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한림대학교가 개교한 해인 동시에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부가 모습을 드러낸 해이다. 미니 대학으로 출발한 한림대학은 최초에 4개 학과로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사회복지학과(현재의 사회복지학부)였다. 설립자는 사회복지를 연마한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한국의 사회복지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게 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교 원년에 본인은 본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어 학과 창설을 주도했다. 사회복지학과의 첫 교수가 된 것이다. 본인에 부여된 첫 과제는 학과 체제를 조직하고 발전시키는데 방향이 될 목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초창기 한림대 사회복지학과는 교육에 치중하고자 했다. 우선의 과제는 학생들을 유능한 사회복지 인재로 교육하여 사회복지 실천 현장에 나아가 헌신하게 하자는 것이다. 한림대 출신들이 사회복지 현장에서 훌륭히 일하는 가운데, 연륜이 쌓이고 인원이 늘어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 커져서 한국의 실무 현장을 주도했으면 했다.
교과과정 편성은 그런 의도를 반영하여 편성하였고, 초창기 교수진도 실천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교수들을 모셨다. 일반적으로 현실과 유리된 강의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타 대학 사회복지학과와는 다른 점이었다.
당면한 중요 과제는 졸업생의 진로였다. 가까운 미래에 한국의 사회복지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따라 졸업생들의 고용기회도 크게 열리리라고 전망했지만, 초기 졸업생의 취업은 녹녹지 않은 현실이었다. 사전 계획에 따른 의도적 노력과 전력투구가 필요했다.
“학생들은 비싼 교육비를 부담하고, 긴 대학 과정을 이수한다. 그중 많은 시간 전공에 매진한다. 그 결과로 졸업하고 사회복지 현장에 나가 취업한다.” 이것이 대학 사회복지 교육의 선순환 과정이고 존재 이유이다. 학생이 졸업 후 본인이 원하는데도 전공 분야에 취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고 누군가에게 책임이, 그 일단은 교수에게도 있다. 본인은 이런 책임 의식을 가졌으며 우리 교수진도 이런 생각을 공유했다. 비록 채택되지 않았지만 “우리, 원하는 학생들에게 100% 취업 보장을 선언하자”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개교 초기 사회복지 현장은 소규모 단위로 움직이고 있어 인력을 대규모로 공개 모집하기보다 많아야 10명 이하의 인원을 알음알음으로 추천을 받아 면접 또는 간략한 테스트를 거쳐 채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채용 정보를 얻거나 교수가 추천 의뢰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교수가 사회복지계에 발이 넓은 것이 유리하고, 우리 교수들은 그런 위치에 있었다. 또한, 교수는 사회복지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어서 교수가 서신으로나 유선으로 추천하면, 그 존경이 얹혀서 제자의 가치를 높혀 주었다. 교수의 제자 취업 부탁을 사회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보고 있다. 그것이 교수의 임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 자식은 안 되지만 제자는 부탁할 수 있다.”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 시험을 응시하고 그 결과에 걱정하는 한 학생이 있었다. 자신은 꼭 현재 사는 도시에 근무할 사정이 있는데 변두리 군으로 발령을 받을 것 같다고 한다.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눈치였다. 도와주고 싶어 강원도청 담당국장을 찾아갔다. 국장은 합리적인 본인의 설명을 이해했는지, 담당 사무관을 불렀다. 그는 그 학생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결정이 난 듯 난처해했다. 우리는 가능성이 거의 없으리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교수의 도전이 학생의 생애 근무지를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 결정짓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학생의 취업을 안내하는 세심한 배려가 효과적일 때도 있었다. 면접이나 필기시험이 예정된 학생에게는 미리 만나 그 기관의 성격과 면접 예상 내용을 설명해 줬다. 학생들이 자주 응시하는 어떤 특정 사회복지기관의 경우는 예상 문제지를 참고하라고 건네주고, 끝나고 난 뒤 출제 문제와 면접 내용을 적어서 제출하라고 부탁했다. 그것들이 쌓여서 소위 족보가 됐다. 어떤 응시생에게 살짝 물어본 적이 있다. “참고가 됐니?” 그 학생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80% 정도가 거기서 나왔어요.”
학생들과의 모임에서 본인은 강조했다. “사회복지계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우리는 같은 배를 탄 것이다. 이전의 초·중·고와 달리 전공 분야에서 일하는 한, 사제와 동문 간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든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일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니 교수, 동기 및 선 후배를 그런 눈으로 보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
졸업생들 간의 튼튼한 연결체계(network) 구축은 졸업생의 진로를 위한 중요한 과제였다. 졸업생이 현장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가 일하는 기관의 취업 정보를 학과와 미취업 동창과도 나눌 수 있고 필요하면 교수에게 협력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학 중에 학생들의 친교가 활발해야 하고 협력의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 졸업생 상호 간 끌고 밀어줌으로서 취업이 학과의 개입 없이 자체적으로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 이에는 교수진의 의도적 개입이 필요하다. 졸업생들 자체에 맡기고 대학이 방관하면, 그 기능이 불충분하리라고 보았다. 그들은 당면한 일에만도 벅차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지가 크지 않다.
교수, 재학생, 졸업생의 활발한 교류를 위해서는 세 가지 할 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동창회 명부 작성이었다. 이 일은 누가 전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학교 당국에 요청하여 시간제 아르바이트 학생을 배정받아 이 일을 전담하게 했다. 컴퓨터가 있는 일정한 사무적 공간도 제공했다. 그 결과로 나온 명부는 실제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데 긴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 명부는 수시로 변동하는 인적 정보에 따라 계속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될 필요가 있다.
교수와 졸업생, 재학생이 만나는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한 배를 탔다고 하지만 누가 탔는지 서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졸업생이 전공에 관련한 최근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필요가 있어 이를 모교가 제공해주는 것이 적합하게 보였다. 그래서 교수, 졸업생, 재학생이 만나는 연찬회를 몇 번 개최했다. 의미는 좋았지만 번거로운 노력이 들어가는 이 일을 계속 진행하기는 어려웠다.
세 번째 일은 구성원 상호 간의 소식을 전달하는 동창회 뉴스 레터 발간이다. 하지만 정기 간행물 발간은 벅찬 행정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에 마음만으로 끝났다. 졸업생이 더 증가하고 실무분야에서 활약이 더 활발해질수록 이 필요성은 더 부각 되리라 예상한다.
교수와 학생의 인격적인 만남은 대학 기능의 한 부분이다. 대학 당국이 학년 지도교수 제도를 둔 것은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이다. 학생들은 언뜻 교수와의 사적인 만남을 어려워한다. 교수가 일부러 그런 만남의 기회를 만들 필요성이 그래서 나온다. 본인이 고안한 독창적인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의무적으로 주말에 등산함께하기와 호출패 프로그램이었다.
본인은 등산을 누구보다 좋아하여, 다소 험하지만 빼어난 등산코스의 조건을 다 갖춘 춘천 근교의 삼악산을 수도 없이 올랐다. 지도 학년 학생들 40명에게 5명이 한 조를 이뤄 매주 한 조씩 토요일에 삼악산을 오르자고 제안했다. 본인의 강의 시간 출결에 고려하겠다는 압력을 넣기도 했다. 조마다 조장을 둬 인솔책임을 지우고 순차로 시작했다. 등산을 안 해본 학생이나 여학생 중에는 힘들어하는 학생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잘 따라주었다. 험한 코스는 서로 잡아주고, 앞장서고, 산을 넘어서 나오는 계곡에서는 시린 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코스 끝 등선폭포 입구에 닿으면 그곳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전을 파는 그 집은 우리 학생들이 앞서 이용했던 터라 교수와 학생들, 그 팀이라고 알아봤다. 식욕이 왕성하고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한 학생들은 잠깐 사이에 접시와 막걸리 주전자를 비웠다. 교수가 사는 것이니 원하는 대로 시키라고 했고, 그 집 주인 남자는 우리에겐 평소보다 더 두껍고 큰 부침을 연실 내왔다. 함께 오르고 걸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부축하고, 떠들고, 웃고, 먹고, 마시면서 인정이 두터워졌다. 우리가 통합이라는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느꼈다.
호출패 활용은 학년 지도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한 번씩 만나는 프로그램이다. 여자의 핸드백에도 들어갈 자그마한 패의 한 면에 지도교수와 면담할 수 있는 주 단위 세 번의 시간대를 기록한 스티커를 부착했다. 그리고 그 패를 소지한 학생은 자유롭게 편한 시간대를 선택하여 교수실을 방문하게 했다. 먼저 시작한 학생이 다음 자원하는 학생에게 그 패를 전달하고, 그런 학생이 없을 경우는 출석부의 순서대로 돌아가게 했다. 그 패를 소지하고 있으면, 지도교수를 만나야 한다는 의무감이 떠오르게 했고, 교수도 그 시간대에는 연구실에 머물러 기다렸다.
사회복지학부 전 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봄 축제 기간 프로그램인 철인 삼종 경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본인이 원래의 이 경기를 지역 여건에 맞게 우리 스타일로 바꿔 한림철인삼종경기라고 이름 지었으며, 본인이 주도하고, 사회복지학부 학생회가 운영했다. 1993년부터 시작하고, 본인이 퇴직한 4년 후인 2009년 17회로 종결한 장수 프로그램이다. 1999년 5월 한림대학보 교수논단 <한림원>에 본인이 기고한 “어느 날의 긴 싸움: 제7회 철인삼종경기에 부쳐”에 실린 글의 몇 토막을 살펴보자.
- 650고지인 삼악산을 등산으로 넘고, 16㎞의 의암호반을 자전거로 달리며, 곧이어 춘천댐을 기점으로 20㎞의 거리를 마라톤으로 뛰어 한림대학으로 입성한다는 것은 피나는 자기와의 싸움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생애 중 가장 길고 지루하며 고통스러운 싸움으로 기록되어도 좋을 것이다.
- 피곤한 육신은 싸움을 이 정도에서 멈추라고 아우성이다. 이제 발걸음을 뗄 힘조차 없다. 마의 언덕을 넘어 성심병원을 지나 학교에 진입한다. 골인 지점에 이른 것이다. 드디어 나는 해 낸 것이다. 승리의 만족감에 떨린다. 나른한 피곤 속에 내가 해낸 일에 도취한다. 나 자신에게 외친다. “나는 할 수 있다!”고
- 그러나 골인 지점에 도착하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신체가 말을 듣지 않아 이제 물리적으로 전진이 불가능하다면 육신이 나의 의지와 다르게 쓰러져야 한다. 그 시점까지 내 정신력이 버틸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경우도 이 싸움에서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 이 행사를 주관하는 사회복지학과 학생회의 노고에 감사하고, 특히 5㎞ 간격으로 식수대를 설치하여 봉사하는 아름다운 마음씨의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매회 50명 내외의 학생이 참가했다. 기백이 넘쳤던 남학생들은 누구나 재학 중 한 번은 참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강단 있는 여학생도 매년 5명 내외로 참가했다. 선수 대부분은 중도에 낙오하지 않고 완주했다. 교수 본인도 13회 완주했다. 시상식과 뒤풀이에서 학생들은 흥에 들떴다. 본인은 시상금을 포함한 일부 경비를 본인의 퇴직 전까지 기꺼이 보조해줬다.
또한, 나보다 앞서 골인 테이프를 끊는 학생들에게는 프로스팩스 농구화 한 켤레씩을 선물하겠노라고 공표했다. 경기 중에 있었던 이야기다. 레이스 도중 너무 힘들어 쉬다가도, 내가 뒤에서 접근하면, 다시 안간힘을 다해 뛰기를 반복하던 한 무리의 학생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들은 운동화를 놓치는 것이 아까워서라기보다 나이 많은 교수의 추월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학교 당국에 대학 차원에서 이 스포츠를 인수해 줄지 타진한 적이 있다. 대답은 ‘NO’였다.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긴 17회 동안 경미한 사고 한번 나지 않은 것이 놀랍다. 사회복지학생회가 그만큼 훌륭히 대회를 운영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고가 나도 주최 측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하니, 선수들은 조심을 거듭했을 것이다.
춘천에 거주하는 본인은 봉의산에 오를 때가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고즈넉이 남쪽을 향해 자리 잡은 한림대학교 캠퍼스가 보인다. 너무 조용한 모습이다. 정중동이라고 할까. 그 건물 안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이 연구를 위해, 학습을 위해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속의 일원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
산기슭을 내려오다 보면 본인이 몸담아 시간을 보낸 이전의 내 연구실 창문이 보인다. 궁금하다. 지금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거기서 만났던 그 숱한 학생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또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서, 그 학생들은 부모가 되고, 자녀가 대학을 마칠 나이가 되고도 남았다.
시대는 많이 변했다. 과거 이야기는 참고는 할 수 있으되 현실적이 아닐지도, 그래서 본인의 시대를 주장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정작 더 중요한 이야기들을 빼놓은 것 같아서 아쉽지만, 이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